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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파(三賢派)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의 1세조(世祖)인 김관(金管)은 고려(高麗)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歷任)하고 학교(學校)를 설립(設立)하여 유학(儒學)을 진흥(振興)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金克一)의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兄弟)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김일손(金馹孫)은 1486년(중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親交)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怨恨)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登極)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參與)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金馹孫)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發見)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金馹孫)은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罪)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棺)을 꺼내어 시체(屍體)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金馹孫)의 강직(强直)한 기개와 재능(才能)은 후일(後日)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中宗)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世上)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金馹孫)의 짧은 생애(生涯)를 애석(哀惜)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며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김일손(金馹孫)이 참수(斬首)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때 풀려나와 평생(平生)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個月)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辭職)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삼현파 족보의 내력


(1) 김해김씨 삼현파는 조선 연산군 4년 무오사화(1498년)로 인해 자손들의 화는 홍수같이 닥쳐와 가문이 뒤집히고 일족 대부분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으며 임진왜란(1592년), 정유재란(1597년)을 거치면서 많은 선대 문적이 소실되고 선조의 분묘를 받들지 못한지라, 조선 현종원년(1660년)에 자계서원을 사액하고 삼현선생을 봉안 증직시킨 계기로 1685년에 종손(성율)께서 문정공(휘 관)을 파조로 한 삼현파로 분파하고 삼현파보(숙종병인보)를 발간함.

(2) 전설이 공(문정공 휘관)과 아래 양대(명회재 휘문숙, 돈옹공 휘 항)의 묘소가 낙동강위 저소산에 있다고 하였으나 여러 번의 병화로 찾을 길이 없다가 1921년 (신유년)에 다행히 지석을 얻으니 보첩에 실린바와 틀림이 없어 산소를 수축하고 해마다 향화를 올리고 유동에 재실을 지어 모이는 곳으로 했으나 협소하여 종손 (진 곤)께서 1948년 (무자년) 가을에 마을앞 언덕에 터를 정하여 8년간의 역사끝에 1955년 저산재를 준공하고 이를 계기로 1956년(병신년)에 종손(진곤)께서 김해김씨삼현파 대동보 (병신보)를 저산재에서 발간함.

(3) 세기의 변화와 모암재 준공(1975년)을 계기로 종손(종경)께서 김해김씨 삼현파 대동보(을묘보)를 발간함.

(4) 그간 몇 차례의 대동보, 파보의 발간이 있었으나 정보, 통신, 교통이 여의치 못해 동참하지 못하고 각문중 에서 제작한 가첩 또는 세보, 지역에서 발간한 지역보로 족보를 대신하고 있어 상계가 불명확하고 대동보와 일치하지 않아 이를 통합 정리할 필요가 있어 종손(종경)께서 1988년 저산서원에 보청을 열고 기초를 닦아 1990년에 대구 대현동에 보청 사무실을 두고 편찬을 추진하여 1995년(을해년) 김해김씨 삼현파 대동보(전37권)을 발간함.

(5) 세기의 변화와 전자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시대 환경이 변화하고 1995년 대동보에 여러가지 사유로 등재되지 못한 문중이 많으며 특히 한파조 아래 별도의 지역 대동보가 발간되고 있어 이를 바르게 하기위해 종손(재수)이 종회의 동의로 2016년 1월부터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1520번지에 김해김씨 삼현파 대동보 편찬 사무실을 열고 삼현파 대동보 편찬을 추진중에 있음.